김시원과의 대화
2026년 4월 11일 경기도 부천시
윤지원: 이 전시에서 선보이시는 작품에 관한 설명을 간단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시원: 평면, 오브제의 경우 <무제(하루 일년 일생)>이라는 작업이고요. 한 장의 A4 종이를 하루에 한 번씩 구겼다가 펼치는 행위를 1년 동안 반복하는 작업이에요. 오늘 구겼다가 펼치고 다음 날 그 종이를 다시 구겼다가 펼치는 식으로 말이죠. 2013년에 시작해서 2014년에 전시되었어요. 2021~2022년에는 A4 종이를 구겼다가 펼치는 게 아니라 펼쳤다가 구기는 방식으로 1년 동안 반복했고, 이때 마지막 날 구겨진 종이를 조그마한 좌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윤지원: 종이는 애초에 펼쳐져 있잖아요.
김시원: 네, 첫째 날은 펼치는 행위 없이 구기기만 하는 거죠. 다음 날부터는 전날 구겨놓은 종이를 펼친 뒤 구기는거고요. 구겨진 상태가 결과물이 되게끔.
윤지원: 그래서 두 종류의 오브제 중 하나는 구겨져 있는 상태이고, 하나는 펼쳐져 있는 상태군요. 영상 작품인 <무제(24)>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시원: <무제(24)>는 2022년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있을 때 금천예술공장을 조금 무심하게 24시간 동안 담아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역시 일정한 규칙 속에서 진행한 작업이에요.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고 하루에 한 시간씩 한 장면을 찍는데, 예를 들어 오늘 10시부터 11시까지 기록하면 그 이후에는 10시부터 11시가 아닌 다른 시간대 이를테면 1시부터 2시까지 혹은 8시부터 9시까지 촬영하는 거죠. 이미 찍었던 장면을 다시 찍지는 않았고요. 이런 방식으로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대의 1시간을 계속 찍고 모은 뒤 시간순으로 펼쳐 놓아 24시간 길이 영상을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 24시간 길이 영상을 규칙적으로 잘라 붙여서 1시간 길이 영상으로 만들고, 그 1시간 길이 영상을 다시 규칙적으로 잘라 붙여서 1분 길이로 만들었지요. 이 세 영상을 동시에 전시하는 작업이었고 이번 전시에는 1분 길이로 만든 영상만 전시합니다.
윤지원: 세 영상이 같은 영상의 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각기 별개의 영상으로 대하시나요?
김시원: 아, 그렇게 딱 잘라서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세 개의 영상이 한 번에 전시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했고 매번 그런 생각을 하지만, 반드시 언제나 세 영상이 한 덩어리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따로 전시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건 아닌데… 제가 생각한 이런 부류의 작업 이미지는 고리처럼 엮여 있는 모습인데요. 하나만 보는 것보다 세 개를 동시에 보는 것이 더 좋지만… 그런데 뭐가 더 좋다는 말은 좀 이상하네요. 어쨌거나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만 빼서 본다고 기능을 아예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윤지원: 긴 영상 같은 경우에는 러닝 타임이 24시간이잖아요. 사실상 24시간 동안 관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요, 관람객이 긴 영상을 전부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렇게 찍었다, 그렇게 만들어졌다라는 아이디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그 작품을 충분히 관람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시원: 둘 다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영상을 세 개로 나눴을 때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24시간 길이 영상은 마클레이의 작업처럼 제가 10시에 찍었던 영상을 관람객이 10시에 볼 수 있게끔 전시했고, 그 옆에 1시간 길이로 편집된 영상은 정시에 시작해서 재생을 반복했고, 다시 그 옆에 1분 길이로 편집된 영상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반복 상영했어요. 하나의 재료에서 그렇게 쪼개진 것을 보아야 내가 경험하는 시간과 영상 속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24시간 길이 영상을 다 봐야 무언가 감각된다기보다는 (그럼에도) 일정 시간 이상을 봐야 알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다 보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슥- 하고 짧게 보고 아는 것에서 그치는 작업은 분명 아닌 거죠. 특정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아이디어를 아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니까 다시 답하자면, 둘 다 중요한데 보는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전달되길 바라는 거죠.
윤지원: 김시원 작가님의 경우 영상을 제작하는 방식과 오브제를 만드는 방식이 방법론 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행동을 강제하는) 지시문을 먼저 작성하고 이를 수행한 결과를 제시하는 식의 구조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오브제일 때와 영상일 때 상당히 다르게 인식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오브제에서는 거기에 축적된 작가님의 행동을 좀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상일 때는 카메라라는 자동 기록 장치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찍힌 대상에 정신이 쏠리기 마련이고, 찍는 사람의 존재는 종종 잊힙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유사한 방법론으로 만들었어도 퍽 다른 효과를 낳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김시원: 오브제를 만들거나 설치,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달리 특히 영상은 영상이 재생되는 시간도 다뤄야 한다는 게 저에게 좀 재미있는 요소로 다가와요. 영상은 한 번에 한순간에 한눈에 전체가 나에게 들어오지 않잖아요. 10분 길이 영상이면 10분이라는 시간을 내가 함께 보내야 하는데, 그것이 타 매체와는 다른 경험을 주는 것 같아요. 영상 작업할 때 그 부분을 계속 생각하며 작업하게 되고 영상을 보는 관객도 함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윤지원: 네, 시간은 김시원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관객이 인식하는 시간도 있지만 작가님이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에 관한 계획 자체가 작업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언제 무엇을 한다’는 식으로 행동을 강제하는 지시문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방식으로 계속 작업하시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김시원: 어? 잘 모르겠어요. 그거는. 그냥 게을러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답변이 될지 모르겠는데 제 생각에는 일단 제가 좀 게을러서 그런 것 같고요. 게으르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 어떻게 어떻게 움직여야겠다는 방식을 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일종의 이정표처럼 작동하는 거죠. 예를 들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쉬지 않고 걷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죠. 지침이기도 하고 족쇄 같기도 한데 어쨌거나 그것에 의해 내가 움직여지죠. 규칙이나 제한, 제안 이런 것들이 저에게 다가와 저를 뒤에서 미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거기에 밀려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게 되고. 어떤 작업을 하든지 그래요. 그리고 여기엔 이상하게 틈이 있어요. 규칙에는 항상 틈이 있기 때문에. 그 틈이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움직이게끔 만들고…
또 흔한 오해가 있는데, 예를 들면 무제(하루 일년 일생)의 지시문, 그러니까 작업 규칙에 관해 설명했을 때 누군가는 설명만 들은 뒤 작업은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하루에 한 번씩 365일 동안 구겨진 A4를 보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상상해 내지 못해요. 다시 말해 지시문을 읽고 구겨진 A4를 보거나 구겨진 A4를 보고 지시문을 읽은 후에야 “아- 이건 뭐 그냥 지시문만 읽어도 되네.”라고 생각하죠. 지시문을 써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어떤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더라도 그게 무엇이 될지 확신할 수 없어요. 이것도 틈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제 머릿속에 이미지가 선명히 떠오르고 그걸 실재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 같기도 해요. 좀 두서없이 이야기했는데 정리하자면, 역시 제가 게을러서인 것 같고 그럴싸한 이유를 하나 덧붙인다면, 소위 내려치는 번개를 잡듯이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윤지원: 작업의 초기에는 전시를 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다루셨죠. 근래로 올 수록 시간이라는 주제를 더 많이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엔 어떤 이유가 있나요?
김시원: 전시를 다루는 건 저에게 중요하고 언제나 그러길 바라요. 근데 전시 기회가 없으니까. 물론 전시가 너무 많으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여하튼 저는 전시 기회가 없는 편이어서 전시 공간에서 전시, 전시 공간에 관한 작업을 자주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기존 작업을 전시하더라도 그냥 둬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공간에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요. 그래야 무언가 벌어질 것이란 생각을 하죠. 그리고 시간… 시간에 대해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기보다는… 전시장에서 그 공간에 관한 무언가를 하면 대체로 일시적인 설치를 하게 되는데 일단 그 점이 시간과 관련 있는 것 같고요. 시간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건.. 내가 작업을 하는 과정 속에서 작업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작업, 결과를 약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더라도 과정에서 이런 모양을 갖고 나온 것이니까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영상 작업의 경우엔 누군가에겐 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저에게는 가장 돈이 적게 들고 결과물도 보관하기 쉬워서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전시 공간에 관한 일시적인 설치를 할 수 없으니까, 다시 말해 전시장에서 무언갈 할 수 없으니까, 방에서 이걸로 뭔가를 해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한 거죠. 영상을 만지면서 자연스레 시간에 관한 관심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윤지원: 이야기의 전제는 ‘어쨌든 나는 작업을 해야 한다’라는… 뭐랄까요, 강박과는 다른 것 같고 그러니까 본인의 숙명처럼 여긴달까요. 이렇게밖에 할 수 없으면 이렇게라도 해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할 수 없으니까 나는 하지 않을 거야라는 선택도 충분히 할 수 있단 말이죠. 무엇이 작업을 하게 만듭니까?
김시원: 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누구나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을 붙잡는 뭔가를 마주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걸 해소하는 방식이 작업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만 나는 반드시 작업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작업은 안 할 수도 있고 안 하게 되면 그냥 안 하는 거지 뭐 그걸 “반드시 꼭 해야 해” 이런 생각은 안 해요. 그런데 뭔가 목에 걸려 안 넘어가고 그럴 때 그걸 푸는 방법이 저에겐 작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 하는 것 같아요.
윤지원: 몇 년 간의 공백기를 제외하면 거의 20년 동안 꾸준히 작업을 해오셨어요. 그 목 걸림은 매번 같은 느낌인가요? 항상 다른가요?
김시원: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죠. 그때그때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작업을 꾸준히 한 것 같지만 사실 작업량은 많지 않거든요. 작업한 기간에 비해 작업량이 적은 건 앞서 말했듯이 작업이 거의 항상 전시와 맞물리는데 전시 기회가 적다 보니까… 이상한 표현이지만 근래 영상 작업을 연이어 하면서 전시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작업 상당수가 전시와 묶여 있었던 걸 생각하면 좀 재밌는 일 같고 그 점은 예전과의 차이라면 차이겠지요. 다만 완성한 영상 작업을 전시장에 틀면 어딘가 좀 아쉬움이 남아요.
윤지원: 작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보통 지시문을 먼저 만드시나요? 어떤 과정을 거쳐 작업하시나요?
김시원: 짧은 글을 쓰긴 합니다.
윤지원: 먼저 스테이트먼트를 쓰시나요?
김시원: 스테이트먼트라기보다는 메모? 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작업에 관한 얘기보다 대체로 내가 어떻다 뭐가 어떻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느낌이다 같은 글을 먼저 써요. 그러면서 작업을 시작해요. 이를테면 최근에 작업한 <늦은 출발> 같은 경우 2024년 12월 3일 여의도에 가지 않은 나 자신을 못 견디겠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 뒤 시작했죠. 이런 식이에요. 무언가 나를 계속 붙잡는 것에 대해 잡문 같은 걸 쓰고 그러다 보면 작업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규칙 같은 게 나오죠. 지시문이 먼저 나오진 않아요.
윤지원: 지시문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결과물과 실제 결과물 사이에 생겨나는 대비랄까요, 긴장이 제게는 큰 재미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지시문을 읽고 안 읽고는 작품의 감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에 지시문을 작품과 함께 보여주는 게 더 흥미로운 관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런 작업에서 지시문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는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시문을 직접 손으로 써서, 일종의 드로잉 형태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작품이 되기 전의 무엇이면서 작품이기도 한 상태의 반영처럼 읽히기도 해요.
김시원: 드로잉이요?
윤지원: 지시문의 텍스트를 인쇄하지 않고 직접 그리시잖아요.
김시원: 아, 그렇죠. 글자를 그린 것이기도 하니까… 이것도 게을러서 그런 건데 직접 그리면서/쓰면서 마음을 잡아요. 별거 아닌 것이더라도 손때가 묻으면 거기에 좀 더 애정을 갖게 되고 좀 더 관심을 두게 되는 것처럼요. 단순히 프린트로 출력해서 이걸 하겠어! 라고 하면 잘 못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직접 쓰면서 내가 이걸 이렇게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거죠. 역시 이것도 게으른 사람의 등을 떠밀기 위한 도구인 셈이네요. 그리고 썼다가 다시 쓰는 경우도 있어요. 지시문의 문장이나 내용이 조금씩 바뀔 때는. 물론 일단 쓰죠. 일단 쓰고 그다음에 무언가 바뀌거나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쓰고. 무엇보다 이런 글이 저한테 무척 중요한데…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면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도 실행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니까. 요컨대 “이런 미술은 나도 하겠다.”라는 말이 나오면 좋겠어요.
윤지원: 지시문의 구성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원론적으로 지시문을 쓰고 끝까지 가봐야지 결과물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실 머릿속에 결과물에 대한 예상치는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지시문과 결과물 사이의 균형에 관한 고려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시원: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저에겐 지시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해요. 가독성이란 말은 조금 이상한데.. 아무튼 제가 지시문과 그 지시문을 실행한 결과를 보여줄 때 그 결과가 정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김시원은 이런 방식으로 실천했다는 걸 보여주는 예제 같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닌 누군가가 해볼 수 있는 공간이 중요하고.
그런데 지시문을 읽고 다르게 작업할 수도 있지만 지시문 자체의 여백도 조금씩 크기가 다르거든요. 어떤 지시문은 여백이 커서 해석할 틈이 엄청 많고 어떤 경우는 무척 좁단 말이죠. 예를 들어 솔 르윗의 지시문은 해석의 틈이 별로 없어요. 약간의 변화는 가능하지만. 그게 나쁜가? 라고 되물으면 그건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일종의… 작가의 책임과 관련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매우 두루뭉술하게 쓴 지시문을 누군가 실천했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그 실천이 제 입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건 제 지시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은 겁니다.”라고 말하면 이상해지죠. “각자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죠 이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하하”하며 슬쩍 비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상해요. 다시 말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지시문이 그런 모양을 갖고 있다면 받아들여야 해요. 그 부분에 관한 조정? 고민?이 지시문에 있어야 하고 그게 책임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학생들을 가르쳤을 땐 탄성력이란 표현을 썼어요. 스코어나 지시문에는 탄성력이 언제나 있는데, 너무 빡빡하면 해석의 여지가 적어지고 결과의 차이가 크지 않을 테니 조금 더 예측할 수 있겠죠. 반대로 너무 넓어서 헐렁하면 예측하기도 어렵고 이것저것 다 가능해지니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지시문 안에서 긴장감을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그건 매우 어렵죠. 매번 고민하는 것 같아요. 고민은 하는데 정작 작업이 시작되면 그 생각은 잘하지 못하고 그냥 하죠.
윤지원: 작가님의 작업에서 ‘단위’가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한 해의 마지막 날 23시 59분에 폭죽을 터뜨려 이 작업도 새해 첫날에 시작해서 마지막 날에 끝나고(무제(어제 내일)), 그리고 <무제 (걷기)>의 경우는 24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언어화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라는 가설을 생각해봤습니다. 어떨 때는 신체가 기준이 되거든요. (무제(x)) 이 역시 언어로 표기하기 위한 단위로서의 신체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가 선행한다는 점이 유도하는 패턴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시원: 오, 좋은데요? 저는 생각 못 해봤어요. 지시문을 쓰는 건 거푸집을 만드는 것이기도 한데, 그 틀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면 어떤 단위가 필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지시문에 “저만큼 달려라”라고 쓰여 있다면, “저만큼”의 범위를 정해야 해요. 각자의 ‘저만큼’이 있겠죠. 그 열림이 좋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런 가능성이 한 지시문 안에 크게 자리 잡으면 아무 말이 되어 버리니까, 그런 부분을 고려하다 보면 단위가 나오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저도 막연한 문장을 쓰고 그대로 두곤 해요. 예를 들어 무제(걷기)에는 “<걷기>는 중도 포기될 수 있으나, <걷는 이>는 포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같은 어딘가 서로 맞지 않는 문장처럼 말이죠. 어쨌거나 저는 해석의 여지만큼이나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윤지원: 그 동안의 작업을 쭉 펴놓고 봤을 때 드는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작업을 이만큼 했네, 항상 다른 상황에서 다른 문제를 해결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늘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네, 같은. 저도 제 작업에서 일종의 패턴을 발견할 때가 있거든요. 여기서 작가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신 적이 있는지, 있다면 여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지 혹은 여기서 지키려고 하는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시원: 없어요. 벗어나려고 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패턴이 보인다면 보일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게 김시원이라는 사람의 작업이고 김시원이 작업하는 방식이니까요. 김시원이 사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양으로 나오는 것이어서… 궁금한데 혹시 어떤 게 보이세요?
윤지원: 예를 들어 어떤 표현이나 접근 같은 걸 피하려고 한다든지, 어떤 주제를 계속해서 선택한다든지.
김시원: 아, 그건 작업하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자기 관심 주제가 명확해서 그 주제를 계속 파고들어 가면서 작업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아직까진 그렇게 작업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깊이 탐구하기 위한 주제물, 매체 같은 게 없는 거죠. 그 대신 내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작업이 되기 때문에 그 반응이 각각 다르더라도 결국에는 김시원이 이렇게 저렇게 반응해서 무언가 나왔다는 동일함이 있다고 봐요. 거기서 일정한 패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예를 든 것 중 ‘표현을 피한다’는 부분은… 제가 표현을 잘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유가 좀 단순하죠. 색을 잘 안 쓰는 이유도 색을 잘 못 쓰기 때문이고요. 강한 의도를 갖고 색이나 표현을 제한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제가 잘 못하는 걸 억지로 애쓸 필요가 있을까? 색을 안 쓰고도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요. 동시에 마음속 깊이 갖고 있는 생각 하나는 현대 미술의 어떤 흐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성과 싸워왔고, 문턱을 낮추려고 했고, 재능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이 제가 미술을 계속할 수 있게 한 것 같고, 때문에 지시문에 지나친 모호함을 덜어내려고 하는 거고, 또 제 지시문을 보고 누군가가 “야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다.” 혹은 ‘나도 해봐야지’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즐거울 것 같고요. 소위 현대 미술이 걸어온 어떤 길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