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심과의 대화
2026년 4월 16일 서울시 중구

윤지원: 먼저 이름에 관해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발표하는 작품에 따라서 여러 이름으로 바꿔 활동하고 계시죠. 이름을 이렇게 사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애심: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작업이 요청하는 작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오래된 기억이긴 한데, 학부 졸업 후 첫 전시를 하고 나서 든 생각이 작가가 되려면 ‘이름이 없어야겠다’였어요. 갓 졸업한 치기 어린 마음에 시스템 속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작가보다는 그때그때 작업에 맞춰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작업을 할 때마다 그 작업이 필요로하는 사람, 각각의 그 사람이 되자고요.

윤지원: 처음에는 무명씨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셨잖아요. 이 이름에서 시스템이 요구하는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지 않은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아요.

애심: 내게 주어진 이름을 없애는 것부터 주력했으니까요. 이름 없음에 대해서, 이름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던 때입니다.

윤지원: 이름에 따라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나요?

애심: 저에게 ‘작가의 이름’은 작업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어서, 작업자의 역할에 따라 작업과의 관계에 따라 그 작업에 맞는 다른 이름이 필요해요. 저는 작업의 구조를 먼저 짜는 편인데, 구조 안에서 작가의 위치와 성격을 가늠해 봅니다. 사실 거의 동시적이지만요.
예를 들어 ‘애심’의 작업에서는 어머니의 어머니, 딸의 딸로 승계되는 일직선의 질서를 비틀고 싶었기 때문에, 외할머니의 이름인 ‘애심’의 자리로 내가 이동했죠. 작가가 외조모의 이름을 훔쳐서 질서를 좀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고. 그런데 어쨌든 이름을 훔치는 자가 도둑, 작가가 도둑이네, 그래서 ≪애심과 도둑≫(2015) 전시를 열고 애심의 이름으로 발표했었죠.
그리고 ‘무랑’ 작업은 가장 시작하기 어려웠던 작업이었는데, 이것은 정말로 작가의 위치 자체를 거의 제로로 만들지 않고서는 시작할 수가 없었어요. 작가의 자리가 텅 비어 있으니까 어쩔 줄을 몰라서 정말 많이 헤맸었는데, 결국 이 작업 안에서 나는 그러니까 나로 인해 생기는 어떤 물결조차도 없게 하겠다, 그래서 ‘없을 무, 물결 랑’으로 이름 지었어요. 거의 다짐에 가까운 작명이었죠. 사회적 대참사를 애도하는 무게감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어떠한 철저한 수동성 안에서 발화할 수 있는 뭔가를 발견하도록 몰아붙이는 과정이 큰 경험이었습니다.
성폭력을 다루는 ‘무랑무아’의 이름에도 조금은 다르면서 유사한 태도가 필요했는데, 내 경험을 단지 재료로 삼을 뿐 이야기의 중심에 내가 있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도려낸 상태에서 가능한 작업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윤지원: 개인을 없애려고 하지만 막상 작업은 개인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애심은 가족사를 다루고요, 무랑은 재난을 마주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죠.

애심: 네, 맞아요. ‘나’를 없애는 게 중요한 것이지 개인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다른 개인을 만들어내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죠. 각각 다른 작가,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저는 늘 그 순간의 그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때그때의 개인으로 분화하는 것이 역으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그것보다 저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작가상과 연결되어 있는 점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초월적인 작가상을 거부하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의 작가임을 더 명확하게 자각하려는 거죠.

윤지원: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개인을 없애는 게 아니라 나를 없애는 거다. 이 차이가 뭘까요?

애심: 그러니까 결국 ‘나’를 총체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나라는 사람을 작가로서의 한 개인으로 총체화하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이가 잠시 출몰하는 것, 그자가 잠시 작가의 위치를 가지고 창작 행위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줄곧 너 아니냐’라고 하면 그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거죠. 나를 없앤다는 의미는 결국 어떤 당위로서의 나, 작업 바깥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젓는 나, 헛소리하고 싶어 하는 나, 계속 똑같은 말을 해대는 나를 좀 조용히 시킨다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첫 질문의 답으로 드렸던 ‘작업이 요청하는 작가가 있다’는 말도 사실 이와 같은 맥락이죠. ‘작가’라는 말 안에 들어있는 권위와 아우라를 선점하고 싶지도 따르고 싶지도 않았어요. 내가 수행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오직 그만큼의 힘만 만들어 가고자 했던 일말의 방책이 아닐까 합니다.

윤지원: 그렇군요. 그럼 각 작가들은 어떻게 작업을 시작하는지, 작업의 동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애심: 작업 초기와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한데, 근래의 저를 보면, 꽤 진부하긴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제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자꾸만 처해 있고 그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우니 웅얼거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주 단순하게 저는 제가 경험한 상황들을 미술언어로 치환해 내는 것이 제 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상황으로부터 멀어져야 하기 때문에 대개 많은 시간 곱씹고 뱉어내는 품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아마도 제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던 ‘것’의 안과 밖이 드디어 보일 때, ‘그것’을 다루는 작업자로서의 내가 그려질 때, ‘그것’을 돌려 말하는 길이 보일 때, 이것들이 직관적으로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윤지원: 이번 참여작인 <나의 어린 것들>은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는지요?

애심: 이번 전시작은 ≪애심과 도둑≫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당시 저는 제가 가까이 지켜본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서사를 다룰 때가 되었다고 느꼈고, 외할머니는 소위 ‘아들 못 낳아서’ 핍박 받은 가부장제의 며느리이자 아내였지만 제가 작업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젠더적인 폭력보다는 그녀들 사이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였어요. 저는 우리가 서로 닮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했고, 이미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와 닮은 어머니와 내가 똑같이 그녀의 유령처럼 또 살아있고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이면서 둘 또는 셋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몹시 생경하고 징그럽다, 친밀한 여성들 사이의 낯섦이 정작 제가 느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지만 둘, 둘이지만 셋일 수 있는 기이한 순간 혹은 장면을 찾고 싶었는데, 마침 알지네이트가 건조하면서 수축하고 변형되는 성질이 떠올랐죠. 어머니와 내가 늙어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어떤 시간을 같이 버티면서 조금씩 모양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요. 그것이 멀리서 보는 어떤 시점에서는 한 사람의 여성 그러니까 나와 어머니가 반반씩 합쳐진 ‘애심’처럼 보일 것이라는 이미지도 같이요.

윤지원: 이어서 <나의 어린 것들>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애심: 이번 작업 <나의 어린 것들>은 두 개의 비디오와 오브제로 만들어졌어요. 캐스팅한 알지네이트가 건조하고 수축하는 과정에서 아이 손처럼 작아졌던 내 어머니의 오른 주먹과 제 왼 주먹이 등장하는데요, 영상에서는 어머니의 두 손이 제 왼쪽 주먹을, 제 손은 ‘애심’의 딸인 어머니의 오른쪽 주먹을 감싸안고 있어요. 두 비디오에 다른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하나는 교통사고 후 낯선 아이처럼 변해버린 어머니와의 시간을 기록한 아니 에르노의 책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의 한 단락을 소리 내어 읽었어요. 다른 하나의 비디오에선 갑작스런 낙상 후에 딸도 알아보지 못한 채 몇 년을 늙은 아이가 된 채로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외할머니 ‘애심’을 막 땅에 묻고, 그 묘에 기대앉은 제 어머니의 모습이 묘사된 「애심과 도둑」의 한 페이지를 읽었어요. 애심의 이름을 훔친 제가 언제 덮칠지 모를 ‘어머니’의 죽음을 향해 그리고 이제 막 ‘어머니’의 죽음이 쓸고 간 직후의 목소리를 대신했습니다.
전시 공간에 놓이는 오브제는 십 년 전 (캐스팅해서) 아이 주먹만 하게 줄어들었던 어머니와 제 손을 한 번 더 캐스팅하여 건조시킨 것입니다. 이제 더는 아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맣게 오그라든 손이 언젠가 점처럼 사라질 머지않은 미래를 가리키는 것 같아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맞이할 공동의 순간이자 어린 딸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윤지원: 제가 생각했을 때에 애심의 작업에서 감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손이 지표적 성질을 가진다는 점인 것 같아요. 손을 작게 조각을 하는 것과는 다르죠. 이번에는 손을 보여주시지만 ≪애심과 도둑≫ 전시에서는 배꼽을 캐스팅하기도 했고요. 이런 작업을 하실 때, 결과물을 어느 정도로 상상하고 작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애심: 저는 거의 백 퍼센트 같은데요. 시뮬레이션을. 물론 인디언 기우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윤지원: 작업에서 몸을 중요하게 다루고 계신 것 같아요. 캐스팅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작업에서 만드는 사람의 행위를 상상하게 만들고요. 목소리도 작품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몸과 연결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작업에서 목소리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애심: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찰나성이라든가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현존성 같은 점들을 좋아하고요. 저는… 숨길 수 없다, 네,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미술이 계속해서 뭔가를 가공해 내고 연출해 내는데 그럼에도 가장 숨길 수 없는 재료 중 하나가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제가 완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그 부딪힘이 좋거든요.

윤지원: 속일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이요?

애심: 네 그렇죠.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재료, 내 뜻대로 잘 안되는 그러면서 조금 좀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요. 물론 불안을 견뎌야 하지만요.

윤지원: 작업하실 때 구조를 먼저 생각하신다고 했잖아요. 구조를 떠올리는 과정도 궁금합니다.

애심: 음… 제가 에이블톤 프로그램을 처음 배울 때, 미디 트랙에서 ‘점 찍는다’고 하죠, 음들을 하나하나 클릭해서 그 많은 음을 일일이 찍어야 하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점이 모여서 마디가 되고 프레이즈가 되고 선율의 단락들이 모여서 하나의 곡이 되는데, 책상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깨알 같은 점을 찍고 있는 이 행위가 꼭 미술하는 행위와 매우 닮았다고요. 그러니까 모니터 앞의 이 사람은 지금 점 하나를 보고 있지만, 그 작은 점의 앞과 뒤를 알고 있고 전체 곡 안에 그 점이 어디 있는지 어떤 음을 내는지 그 작은 점의 효과를 그러니까 그것이 거기 왜 있는지 알고 있다고요. ‘안다’는 말이 전지전능이 아니라 ‘그린다’, ‘느낀다’, ‘꿈꾼다’는 말이겠네요. 저는 구조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작업 내 작은 요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어떤 의미망을 그리는 일이라고요. 그것을 동시에 떠올리는 과정으로요.

윤지원: 작업에서 의미망이 잡힌다라는 그 감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조금 풀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애심: 분명히 우리는 비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비언어들이 모여서 어떤 형태를 갖는다. 형태를 갖는 지점까지 가려고 한다. 놓치지 않고.

윤지원: 저도 영상 작업을 할 때 이렇게 부분 부분 작업하다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는 순간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거든요. 그것과 비슷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도 이걸 설명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애심: 음… 제 생각의 저변에는 이게 언어라는 강력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뭔가를 마구 발산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힘을 가지게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밑에 깔려 있는 것 같고 그러려면 작업의 요소들이 서로 관계하면서 어떤 틀을 맞춰내는 순간까지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뭔가를 만들다 보니 항상 그쪽으로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을까 싶고요. 그것을 저는 미술적 역동이라고 부르고 싶기도 한데, 의미의 망을 짜는 행위가 의미들의 틈에서 벌어지는 손에 잡히지 않은 기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에너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냐는 진짜 설명하기 어렵네요. 어떻게 보면 간단한 것이기도 한데…

윤지원: 그렇다면 그 미술의 언어라는 걸 왜 사용해야 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기존에 통용되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언어가 아니라, 왜 미술의 언어여야 하는지, 이 언어의 가능성을 좀 믿고 있다면은 그럼 그 믿음은 또 무엇일지요?

애심: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것을 언어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미술이 가지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불규칙적이고 감각적이고 조형적인 여러 요소를 엮어서 나름의 이상한 질서를, 어떤 사람만의 카오스적인 질서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니까요. 그 질서의 모양이 제각각이고, 하나의 닫힌 체계이긴 해도 폐쇄적인 것은 아닌, 숨통이 뚫려 있는 (비)질서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야 최소한 우리가, 너를 동시에 나를 소외시키지 않고, 생긴 그대로, 뭔가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윤지원: 네, 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일종의 체계를 고안해내려고 하는 노력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존에 있는 체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체계를 만들어내야 할까요?

애심: 그것이 창작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기존의 것이 잘 맞으면 상관없지만 대개는 잘 안 맞으니까. 피곤한 일이에요. (웃음) 그래서 없던 것을 잠깐 있게 하는 것. 불완전하게. 애써 감추지 않고서. 미술을 통해 불완전함을 불완전한 채로 불완전한 언어를 계속 만들어서, 세상은 한 번에 바뀌지 않으니까, 그렇게 창작의 실천을 이어가는 것… 그런데 저는 한편으로 그러한 노력이 필연적이고 시대적인 지향성을 가진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저 각자에게 맞는 미술의 방법을 찾아가는, 물론 그것이 오리무중의 과정이긴 해도 그렇기 때문에 길이 새로 나는 것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 봐요.

윤지원: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 기존의 체계보다 새로 고안한 이 체계가 보는 사람을 위하는 면이 있을까요?

애심: 미술이 왜 필요할까? 라는 물음으로 들리네요. 타인에게 내 미술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보다 정확하게는, 지금의 미술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왜 필요할까? 라고 해야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되물으니 이미 질문 속에 답이 있어 보여요. 저는 언젠가 도저히 말로 할 수 없는 지금 이 감각을 나만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미술언어가 더 필요해 보였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왔던 ‘언어’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사이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그 특정함만이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애심과 도둑> 작업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것이 어느 미궁에 빠진 자의 부호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암호들, 지시들, 명령들로도 비추어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정한 약속과 반복하여 사용된 규칙이 발견된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떤 작업도 내적 질서를 가지고 그것이 관객을 향해 열려 있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누군가 그것을 발견하고 마음이 동했다면 그 마음 하나가 세상의 모양을 바꾸겠죠. 그러길 바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