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연과의 대화
2026년 05월 10일 서울시 서초구

윤지원: <동방박사의 경배>(2015)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남화연: <동방박사의 경배>는 지오토(Giotto di Bondone)의 그림 속 혜성을 보고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혜성은 아주 원거리에 있어서 나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잖아요. 저는 실재하지만 ‘부재’의 상태로밖에 다가올 수 없는 존재에 꾸준히 관심이 있었어요. 흔적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한 것들, 그러나 대면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 것들이요. 혜성이 과거에는 종말이나 파국을 뜻하다가, 근대에 회귀하는 것으로 달리 보게되었잖아요. 이 전환, 그리고 인간이니까 유한한 시간을 살 수밖에 없는데, 나의 지속 시간과 무관하게 천체의 주기적인 회귀 운동은 계속된다는 그 압도적 스케일에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윤지원: <창문-꿈>(2022)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남화연: 2022년 전시 ≪가브리엘≫에서 선보인 작품이에요. 여러 수태고지 그림에서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날 때 창을 통해 실내로 진입하거든요. 거기서 기적, 혹은 미래의 사인이 당도하는 통로로서의 창을 생각했어요. 전시장인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밀폐된 지하 공간이이기도 했고 당시 코로나 시기였거든요. 그때는 정말 세상의 종말 같지 않았나요?

윤지원: 맞아요. 세상의 종말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죠.

남화연: 그다음은 뭘까 고민하던 시기였죠. 그때 인간이 격리되면서 자연이 재생되는 모습들이 나타났잖아요. 가속되던 속도가 엄청나게 감속되면서 세상의 모습이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비전이나 계시의 통로, 그리고 ‘반사’를 통해 현재의 위치와 시공간을 환기하는 상태를 만들고 싶었어요. 저는 언제나 꿈에 매료되어 있고요.

윤지원: <창문-꿈>은 원래 <가브리엘>(2022)과 짝을 이뤘지만, <동방박사의 경배>와 짝지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동방박사의 경배>와 <가브리엘>, 이 두 영상 작품이 퍽 흡사하거든요. 둘 다 카메라를 보는 인물로 시작하고, 성경의 내용을 담은 그림이 등장하고, 탐사선 지오토와 탐사선 퍼서비어런스가 등장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도래할 대상’에 대한 관심을 다뤄요. <동방박사의 경배>가 더 직설적이라면 <가브리엘>은 더 은근한 방식이지만요.

남화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창문-꿈>도 문이자 눈의 역할을 하거든요.

윤지원: 작업하실 때 <동방박사의 경배>와 <가브리엘>의 유사성을 의식하고 만드셨나요?

남화연: 아뇨. 작가의 실천이라는 게 (유사한 실천이) 나선형을 그리며 계속 변주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재밌네요.

윤지원: 작품에서 카톨릭 모티프가 많이 등장하는데, 의식적으로 가져오시는 건가요?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가닿게 되는 건가요?

남화연: 카톨릭 모티프라고 규정하고 시작하진 않지만 신비나 종교적 기적에는 관심이 많아요. 카톨릭은 저에게 큰 영향을 줬어요. (미사는) 일종의 ‘리추얼(ritual)’이잖아요. 돌이켜보면 노래하듯 응답하는 방식, 매주 반복되는 형식, 일 년 단위로 진행되는 제사의 주기 같은 것들이 퍼포머티브하고 퍼포먼스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혜성이 주기적으로 돌듯 예수의 탄생, 수난, 부활이라는 주기를 계속 반복하는 셈이죠. 신이 아들을 보내 물질로 나타나고, 그가 죽은 뒤 제병을 나누며 ‘이것이 나의 몸이다’라고 믿고 나누어 먹는 형식이나 메시아의 도래는 지연되어야 성립한다는 역설이 흥미롭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깔, 레이스 문양, 초 같은 것들에서도 미감적으로 영향을 받았고요.

윤지원: 일종의 조기 미술 교육이었을 수 있겠네요. 재밌는데요. 언젠가 ‘육화(肉化)’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요. 개념 미술은 ‘탈물질화’된 미술이라기보다 아이디어나 언어가 물질화되는 것에 더 가깝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육화의 개념처럼, 생각이 어떻게 몸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저에게도 있거든요. 작가님은 이를 어떻게 소화하고 계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남화연: 그런 면에서 <가변 크기>(2013) 같이 ‘스코어(지시문)’가 구체적인 몸을 만나 실현되는 작업이 ‘육화’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다만 저는 최근에 설계나 구조를 만들기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경험’을 더 우선시하게 돼요. 저에게는 이게 육화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무엇을 (의도대로) 실현하는 차원을 넘어 몸을 만들어가는 것이죠. 최근에 아프면서 몸이라는 게 절대로 통제가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저는 물질들이 내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환되어 형태를 갖춰 나갈 때, 비로소 작업이 ‘육화’ 된다고 느껴요. 구체적인 몸은 자기가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에 스스로 발화하며 갖춰지는 것 같아요.

윤지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상투성’이라는 말을 동원하곤 하는데요. 상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미 잘 아는 것을 만들면 뻔하고 재미가 없기 마련이죠.

남화연: 저는 예술에 뭐랄까 아마추어적인 면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요즘 작품들을 보면 어떤 프로페셔널함의 추구가 오히려 균질한 생산 양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해요. 이런 걸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윤지원: 작가님이 영상, 퍼포먼스, 오브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결과를 보여주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사용하는 매체의 선택을 내리시는지 궁금합니다.

남화연: 그때그때 관심을 쏟는 매체가 달라지는데, ≪가브리엘≫ 때는 몇 가지 결심을 했었어요. 최승희 작업을 오래 했으니 이번에는 ‘역사적인 것을 다루지 말자’, ‘설명하는 텍스트를 쓰지 말자’, ‘무용수와 작업하지 말자’ 같은 제한 조건을 스스로에게 준 뒤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전의 궤적을 돌아보고 “이번엔 다른 것에 도전해보자”라고 결심을 해요. 올해는 ‘영상을 하지 말자’가 목표였는데 그건 쉽지 않겠네요. (웃음)

윤지원: 말이 나온 김에 영상에 관해 질문하겠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에세이 영화의 외양을 띠고 있어요. 다시 말해 영화적 형식에 가까워 보인다는 말이거든요. 저는 미술가의 영상이 영화에서 출발한 사람의 영상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궁금증이 늘 있어요. 영상을 구성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있나요?

남화연: 저는 전반적으로 ‘정지된 이미지’를 나열, 배치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영화는 보통 움직이는 이미지의 연속인 경우가 많지만, 저는 정지된 이미지들의 연속에 매료되는 것 같아요. <동방박사의 경배>가 초기 영상 작업 중 하나인데, 그때는 영상이 ‘이야기를 담는 데 효율적인 매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사보다는 ‘이미지들의 시간적 조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몽타주와는 조금 다른 개념일 것 같은데, 정지된 조각들이 시간의 위에 배치되며 만들어내는, 언어화되지 않는 어떤 ‘정조적 형태’에 훨씬 더 끌리는 것 같아요. (최근작에서는) 이야기를 담는 것과는 좀 멀어졌죠. 조형은 보통 촉각적이고 시각적인 형체가 있는 거잖아요. ‘이미지 시간 조형’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윤지원: ‘조형’이라는 말이 영상을 만드는 미술가의 접근을 잘 반영하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물건을 만들 때와 동영상을 만들 때,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보여도 거의 흡사한 방법론이 적용된 결과일 수 있죠.

남화연: 제가 (영상의 조형성을) 느낀 게 직접 편집을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편집자 파트너가 있을 땐 구조를 짜는 훈련이 선행됐다면, 직접 만지기 시작하니 편집 프로그램 안에서도 ‘손이 먼저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더라고요. 굉장히 즉물적인 과정이죠. 화면 내 구성을 넘어 편집 과정 자체가 일종의 조형처럼 느껴졌어요.

윤지원: 편집에도 우연적인 ‘손맛’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저도 편집할 때 과감해지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기도 해요. 술을 잔뜩 마시고 편집을 해본다든지 (웃음) 작업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이미지가 눈을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는 일련의 기술 문명을 비평하는 에세이 영화를 기대하게 합니다. 그런데 작품을 다 보고 나면 그 오히려 반대편에 있는, 그러니까 신비를 긍정하는 영상처럼 보여요. 몸을 바꿔서도 계속 남아 있는 무언가에 대한 작업에 가깝달까요. 그런 면에서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등장하는 사람의 눈은 제겐 무언가 보기를 바라는 눈으로 읽힙니다. <창문-꿈> 또한 일종의 기적 통로라고 읽을 수 있고요. 작가님은 오지 않은 것, 혹은 무엇이 되기를 바라며 계속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사고방식이 깊은 곳에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런 생각이 작업이 되기 위해서는 한발짝 더 나아가야 하잖아요. 무엇이 작업을 하게 만드나요?

남화연: 내적인 동기라… 말하기 좀 쑥스럽네요. 몇 년 전부터 인간의 유한한 시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이런 변화는 아카이브나 흔적들을 다루며 무수히 본 죽음이나 소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작가로 사는 게 괴로울 때도 있지만 세계를 다채롭게 볼 수 있고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래서 작업을 하는 게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고요…

윤지원: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으신가요?

남화연: 아뇨. 원래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나서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데, 계속 무언가를 말하게 되네요.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내게 어떤 걸 던져주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잖아요. 만든 사람은 사라졌는데 그가 남긴 작품이 나와 교통한다는 게, 그 사실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져요. 시간과 몸을 초과해버리는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꼭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거창한 야망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게 되는 것 같고. 소망 몇 개는 있어요.